이 세상안엔 수 많은 진실과 거짓이 의도적으로 꾸며진 탈을 쓰고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다.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가를 판단하는 것은 이제는 정보를 소비하는 수신인의 책임이 된 것 같다.
모든 정보의 근원은 관찰되는 모든 것의 현상들이다.
누군가에 의해 관찰된 현상들은 전달의 가치를 지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가치 판단을 통과해야 한다.
그러한 현상들은 정보가 되어 매개체를 통해 수용자에게 전달되는데,
수신되는 정보가 유통되는 과정에서 얼만큼의 변조가 일어났는지는 알 턱이 없다.
가장 오래된 성서조차 관찰된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을텐데,
세대를 거듭하여 전승되는 과정에서 모세가 홍해를 갈랐다는
정보는 과연 진실일 지 명확하게 증명할 수도, 믿을 수도 없다.
우리는 오염되지 않은 진실을 원하는 경향이 있다.
타인이 구태여 나에게 거짓말을 할 것이라는 기대 조차 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동시에 진실을 오염시키고 싶어하기도 한다.
나에게 이로운 거짓말이라면 서슴없이 저지르기 때문이다.
이런 이기 본성 때문인지 세상은 진실과 거짓의 축제의 장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내가 관찰한 진실을 대하는 인간들의 세그먼트는 이렇다.
1.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
2. 진실을 이용하는 사람
3. 진실을 알고도 부정하는 사람
4. 진실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
5. 진실을 알고 싶은 사람
6. 진실에 관심이 없는 사람
1, 2, 3번에 해당하는 부류는 진실을 알고 있다.
누군가는 정직한 방법으로 진실을 공유한다.
누군가는 그릇된 방법으로 진실을 이용한다.
누군가는 이를 부정함으로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
4, 5, 6번에 해당하는 부류는 진실을 모르고 있다.
누군가는 거짓된 정보를 진실이라고 믿고 착각한다.
누군가는 미지의 세상 너머를 탐구하고 싶어한다.
누군가는 탐구하는 행위 자체를 하지 않는다.
진실을 정확하게 아는 방법은 그 정보의 원천을 들여다 보는 것이다.
과거로 돌아가 그 현상을 직접 관찰하는 것이다.
오염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 공유를 요청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불가능하거나 소모적인 방법이 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진실을 올바른 방법으로 알 수가 없다.
추정하는 방법밖에 없다.
나에게 도착한 정보가 거짓으로 응집된 더러운 정보라고 해도
우리는 그 곳에서 진실만을 덜어내는 필터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싸우는 두 사람을 중재하는 사람은 양 쪽 귀를 모두 열어놔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눈과 귀는 열고 오염된 정보를 흘리는 일을 자제해야한다.
적어도 내가 전달할 말들에 책임을 질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진실 앞에서 괴물이 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내가 들은 것이 진실이며, 진실로 둔갑한 거짓을 남에게 전달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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