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여 년간 신을 믿었다.
그리고 운명은 신의 뜻이라고 믿고 살아왔다.
'이것이 나의 운명'이라고 생각이 될 때는 보통 되던 일도 나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였다.
나를 비롯한 이 세계의 모든 피조물들에게 선고되는 운명이라는 것들이
신으로부터 정해지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약한 확신이다.
우리는 보통 운명을 받아들인다라는 말을 많이 쓴다.
운명이라고 정의하는 불가항력 너머에 일어나는 현상들을 관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관찰하지 못하는 진실에 대해선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비참한 처지에 놓여있다.
이러한 모종의 비참함에 휩싸여 본 사람은 운명에 저항해보려했던 사람일 것이다.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의 정신에 이로움을 주기도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운명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고민거리를 지워낼 수 있다.
신의 뜻, 나에게 정해진 판결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인정만하면된다.
종교는 이러한 운명론적 사고에 기틀을 가지고 인간들로 하여금 신의 예언을 기다리게 만든다.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는 운명이 주는 폭압을 이겨낼 수 없다.
다만, 나에게 주어지는 운명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는 생각해봐야 할 주제다.
운명은 세상과 내가 만들어낸 불가항력이다.
나의 행동은 미래의 나를 바꿀 수 있고, 나를 제외한 우주는 나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
이 우주 안에는 나의 부모, 나의 집, 나의 친구, 지구의 건너편의 이름 모를 사람들, 태양계와 은하를 포함한다.
운명은 나와 상호작용이 가능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순서대로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부모가 어릴 적 나에게 바랬던 이상들이 나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
유럽에 사는 어느 남자가 사업을 실패했다는 사실이 나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다.
지구에 소행성이 충돌하는 사건 역시 나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
가능성은 점점 적어지지만, 이러한 사건들은 모두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조건부 확률과 같은 것이다.
운명에 마주한 우리는 과거의 우리에게 무엇이 너를 이렇게 만들었는 지,
미래의 우리에게 이 운명은 누구로부터 발생된 건지 자세하게 설명해주지 못한다.
마주한 운명의 원인들을 모두 설명하기엔 우리는 멍청하다.
만약 그 원인들이 모두 머리 속에 들어왔다고 했을 때 정신 이상에 걸릴 가능성도 클 것이다.
세상과 나 사이에서 일어난 무한대의 상호작용들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기에,
단 하나의 관용으로 설명되는 신의 뜻으로 치부하게 되었다.
신이 우주로 하여금 나의 운명을 이렇게 결정짓도록 하였다면,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내가 하는 모든 행동들이 각본대로 흘러가도록 했다면 신은 실재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다만, 자유 의지로 인한 삶의 주체를 가지고 짜여진 각본들을 찢어버릴 각오를 한 인간이라면,
니체가 운명을 사랑한 것처럼, 수동적으로 운명을 소비하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마저 사랑하여 자신의 삶을 최고의 이상으로 만들어보는 것이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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